원시림의 실패를 '상업의 신화'로 바꾼 한인들의 개척 직업사
게시일: 2026년 5월 27일
게시일: 2026년 5월 27일
이전 글에서 우리는『파라과이 한인 이민 35년사』를 통해 초기 영농 이민자들이 겪었던 눈물겨운 개척기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꽹과리와 삽만 들고 원시림을 일구어야 했던 화이트칼라 엘리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파라과이의 토대가 얼마나 단단한 인내 위에 세워졌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거대한 흐름의 다음 장을 펼쳐봅니다. 바로 정착 양상의 대전환: 농업에서 상업으로의 대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이민 청작(廳作) 보고서』의 핵심 기록을 바탕으로, 어떻게 실패처럼 보였던 초기 영농 이민이 현대 파라과이 한인 사회의 경제적 성공을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지 분석합니다. 특히 "파라과이에 가면 한국인들은 보통 무슨 일을 하며 사나요?"라는 질문을 품고 계신 예비 이주자분들에게 매우 실질적인 역사적 답변이 될 것입니다.
해외 이주를 결심한 한국인들이 가장 현실적으로 마주하는 고민은 단연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파라과이 한인 사회는 남미 내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상업 네트워크와 경제적 위상을 자랑하지만, 이 견고한 성취의 시작점은 사실 '영농 이민의 뼈아픈 실패'라는 역설적인 지점에 맞닿아 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정부의 장밋빛 약속을 믿고 도착한 파라과이에서 우리 선조들이 마주한 것은 비옥한 농토가 아닌 거친 원시림이었습니다. 농사 경험이 전무했던 고학력 도시 지식인 엘리트들에게 정글 개척은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였고, 결국 많은 이들이 농장을 포기한 채 수도 아순시온의 아레구아 합숙소로 돌아와 생계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 담긴『이민 청작 보고서』를 통해, 한인들이 어떻게 펜 대신 보자기를 들고 파라과이 전역을 누비게 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삶의 궤적을 추적합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행위를 넘어 파라과이 사회에 '할부 판매'라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정착시킨 '벤데(Vende)'의 탄생 비화부터, 오토바이 한 대로 험지 짜코(Chaco)를 누볐던 전설적인 개척자들의 실화까지 깊이 있게 다뤄보고자 합니다. 60년 전 선배 세대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의 직업을 창조하고 신용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쌓아 올렸는지, 그 경이로운 기록은 오늘날 파라과이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찾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실질적이고도 묵직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 일본과 중국사람을 의식하여 "동양 식품점"을 한문으로 쓰여짐
오늘날 파라과이 사람들에게 '꼬레아노(한국인)'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강렬한 이미지는 바로 '벤데돌(Vendedor: 판매원)'입니다. '벤데'라는 단어는 '팔다'라는 뜻의 스페인어 동사 'Vender' 에서 유래한 한인들만의 은어인데, 이 단어 속에는 낯선 타국 땅에서 생존을 위해 모든 체면을 내려놓았던 초기 이민자들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 서려 있습니다.
황무지에서 아레구아 합숙소로 돌아온 초기 이민자들 앞에는 당장 하루하루의 호구지책이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날로 가벼워져만 가는 주머니를 만져보며 막막해하던 이들이 선택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한국에서 가져온 개인 소지품과 생활용품을 하나씩 처분하는 일이었습니다.
▲ 초기 이민단 제1진의 아레구아 합숙소
한인 사회에서 최초의 벤데를 시작한 효시로는 1965년 제1진으로 이민을 온 조성화 씨의 어머니 김광명 씨(1898년생), 그리고 같은 합숙소의 최성종 씨가 꼽힙니다. 어느 날 최성종 씨가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팔기 위해 당나귀 한 마리를 사가지고 오자, 김광명 씨가 나도 따라 하겠노라며 이웃 현지인들에게 물건을 내다 판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슬금슬금 물건을 들고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합숙소의 동료들도 너도나도 거리로 나섰고, 예상외로 현지인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한정된 물건이 이내 동이 나자, 한인들은 아예 시장에서 물건을 사다가 본격적으로 파는 상인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천으로 된 커다란 검정 가방이나 이민 가방을 어깨에 매고 걸어 다니며 집집마다 방문하는 도보 벤데 형태였습니다. 초인종이 없던 파라과이에서 대문 앞에 서서 박수를 치면 주인이 나왔고, 비록 서반아어 한마디 못하는 상태였지만 현지인들은 60년대 한국의 농촌 인심처럼 따뜻하게 맞아주며 시원한 전통 차인 테레레(Tereré)를 권하곤 했습니다. 앉아서 굶을 수 없기에 어린 자식을 방에 두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눈물을 삼키며 장사를 나가야 했던 애환 속에서, 벤데업은 한인 사회를 지탱하는 거대한 직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 시골 동네에서 벤데를 하고 있는 한국인 부부
보자기에 짐을 싸서 누비던 도보 벤데는 현지인들의 독특한 소비 습성을 파고들며 정교한 비즈니스 모델로 진화했습니다. 파라과이 서민들은 현금 구매보다는 분할 납부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목돈이 없던 그들을 위해 한국인들이 도입한 것이 바로 약간의 계약금을 받고 주 단위 혹은 월 단위로 조금씩 나누어 수금하는 '할부 판매 방식'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파라과이 유통 시장에 엄청난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초기에는 값이 싼 옷가지와 일용잡화로 시작했던 거래 품목은, 할부 시스템이 안정 궤도에 오르자 고급 옷, 운동화, 청바지, 시계 등의 장신구를 거쳐, 급기야 텔레비전 같은 고가의 가전제품과 건축자재, 금은보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품목으로 다양해졌습니다.
할부 판매가 불황을 모르고 번성할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바로 '한국인의 신용과 성실함'에 있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에어컨도 없는 차량을 타고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약속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수금하러 오는 한국인의 모습은, 현지인들에게 "꼬레아노는 약속을 칼처럼 지키는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물론 아무런 담보나 보증인 없이 오직 구입자의 사인과 집 확인만으로 물건을 인도했기 때문에 위험도 컸습니다. 간혹 물건을 사고 다음 주에 가보면 흔적도 없이 이사를 가 외상값이 허공에 뜨는 경우를 비꼬아 현지인들 사이에서 "잠바가 죽었다"는 뜻의 '무리오 깜펠라(Murió Campela)'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수금이 지연되고 자동차 감가상각을 따지면 겉보기만큼의 폭리는 아니었지만, 이 성실한 수금 과정을 통해 다져진 상호 신뢰는 훗날 한인들이 대량 수입 무역에 뛰어들고 파라과이 시장을 본격적으로 잠식해 나가는 가장 강력한 신용 자본이 되었습니다.
▲ 시내 중심가인 마리스칼 로페스 길에 위치한 플루스 은행의 간판이 한글로도 크게 씌여져 있다
이민 청작 보고서에 기록된 인물들의 삶은 실패를 기회로 바꾼 한국인 특유의 끈기를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짜코 홍' 홍성우 씨 (까사 보께론): 인삼 제품과 잡화를 수입하고 지퍼 공장을 운영하는 그는 이민 초기 모두가 두려워하던 파라과이의 험지, 보께론주를 비롯한 짜코(Chaco) 지방을 오토바이 한 대로 누비며 개척을 감행했습니다. 먼지바람을 뚫고 오지를 돌며 물건을 공급했던 그에게 현지인들은 '짜코 홍'이라는 전설적인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기술 제조의 선구자 정완준 씨 (온성산업): 단순히 물건을 들여와 파는 무역에 안주하지 않고, 원단과 봉제용품 수입 및 직접 '라벨 공장'을 운영하며 가내공업 수준에 머물던 한인 제품업을 본격적인 제조업의 궤도로 올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엔진오일의 정정차랑 씨: 초기 이민자 세대인 그는 처음에 많은 이들처럼 토마토 농사에 매달렸으나, 농업의 한계를 인식하고 과감히 자동차 엔진오일 수입 판매업으로 업종을 전환했습니다. 농사에서 단련된 인내심을 바탕으로 시장을 공략한 결과, 그의 사업은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과 한인무역협회장이나 상공인연합회장, 교육문화재단의 임원 등으로 활동하며 2세 교육을 위해 도서를 기증하고 동포 사회에 헌신하는 아름다운 본을 보였습니다.
▲ 고품질 노트를 생산하는 영제이 물산 공장
한인들이 파라과이에 미친 영향은 경제적 영역을 넘어 현지인들의 '식문화'에까지 닿아 있습니다. 오늘날 파라과이 마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한국 배추(Repollo Coreano)'의 기원은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6년 파라과이로 이민을 온 서학수 씨 가족들은 도시로 나가는 대신 곧바로 아순시온 외곽의 이따(Itá) 지역에서 채소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 파라과이에는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형태의 무나 배추 따위의 한국 야채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 채소를 아열대 기후와 붉은 흙에서 키워내기 위해 서학수 씨 가족은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집념 어린 노력으로 파라과이 토양에 맞춘 무와 배추 재배에 성공하면서, 동포들은 머나먼 타국에서도 고향의 맛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아삭한 맛에 반한 파라과이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이 채소들이 보급되면서, 한인 가족의 도전은 파라과이 전체의 농업 품목을 다양화하고 식탁의 풍경을 바꾸어 놓는 위대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 1965년에 이민온 강상태 씨는 부화장을 경영하였다
벤데업과 더불어 한인 경제의 중추를 이룬 또 다른 축은 '제품업(의류 제조업)'이었습니다. 초기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가정용 재봉틀이나 현지에서 구입한 중고 재봉틀을 이용해, 기존 옷의 실밥을 모두 풀어 밑그림을 그린 뒤 천을 오려 만드는 가내공업 수준이었습니다. 의복 문화가 낙후되어 유행을 따지지 않던 파라과이 시장에서, 통이 좁고 긴 치마인 '맥시'나 '잠바'를 만들어 팔아 날개 돋친 듯 배급을 주듯 물건이 팔려나가며 한인들은 막대한 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밤낮없이 재봉틀을 돌리고 거리에서 수금하며 모은 자본은 한국인 특유의 숭고한 교육열로 이어졌습니다. 1세대 부모들은 '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동포 사회의 인프라를 구축하며 자녀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부모 세대의 눈물겨운 헌신을 보고 자란 한인 2세들은 장성하여 현지의 고급 엔지니어가 되거나, 의료계, 법조계, 무역협회 등 파라과이 주류 사회의 핵심 인재로 당당히 진출하여 공동체의 위상을 격상시켰습니다.
▲ 1965년대 후반기의 전일옥 씨 제품집
실패처럼 보였던 초기 영농 이민의 시련은, 역설적으로 실패를 성공의 밑거름으로 바꾸는 개척 정신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식인 엘리트들이 낯선 땅에서 육체적 노동을 감내하며 길을 만들어냈던 그 용기가, 훗날 파라과이 경제의 상업적 전환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파라과이는 단순히 거주권 조건이 좋거나 세제 혜택이 많은 나라가 아닙니다. 지난 60년 동안 우리 한국인이 '가장 근면하고 신뢰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강력한 브랜드 가치를 직접 몸으로 증명해낸 땅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파라과이에서 시작하려는 비즈니스와 새로운 삶은, 바로 이 거대한 신뢰의 토대 위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파라과이 한인 이민사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다음 글에서도 『파라과이 한인 이민 35년사』의 귀중한 기록들을 발굴하여 여러분과 공유하겠습니다. 선배 세대가 원시림을 개척하며 길을 냈던 그 용기가, 이제는 여러분의 글로벌 플랜 B를 실현하는 확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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