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한인 이민 60년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개척의 기록
게시일: 2026년 4월 20일
게시일: 2026년 4월 20일
파라과이는 오늘날 저렴한 세율과 유연한 거주권 제도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찾는 한국인들에게 '남미의 베이스캠프'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누리는 파라과이 영주권의 편의성과 현지 한인 사회의 높은 위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 글에서는 1999년 재파라과이 한인회가 발간한 역사적 사료인『파라과이 한인 이민 35년사』의 핵심 기록을 바탕으로, 1963년 첫 발걸음부터 시작된 파라과이 한인 이민의 장대한 여정을 심층 분석합니다.
아래에서는 ▲파라과이 이민사의 시기별 특징(영농 이민에서 항공 이민까지), ▲최초의 정착자 최재윤 씨와 한인 공동체의 형성 과정, ▲엘리트 지식인들이 겪어야 했던 초기 농업 이민의 실상과 고충, ▲그리고 이 역사적 기록이 오늘날 파라과이 이주를 꿈꾸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전략적 가치를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60년 전 선조들이 척박한 땅에 뿌린 땀방울이 어떻게 현재 파라과이 영주권자들의 든든한 신뢰 자산이 되었는지, 그 깊이 있는 역사 속으로 안내합니다.
파라과이 한인 사회의 역사는 단순히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합니다. 본서에서는 이민의 성격과 주요 이동 수단, 그리고 정착 양상에 따라 시대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 파라과이 이주를 계획하는 분들에게 현재 한인 사회의 인적 구성과 경제적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① 제1기: 영농 이민의 개척기 (1965년 ~ 1972년)
이 시기는 '선박 이민 시대'로 불립니다. 1965년 2월, 부산항을 떠난 제1차 인솔 이민단 150명이 네덜란드 국적의 '보이스벤(Boissevain)'호를 타고 60여 일간의 사투 끝에 도착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주요 성격: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해외 이주 정책에 따른 '농업 이민'이었습니다.
정착 양상: 카아쿠페(Caacupé), 이타(Itá) 등 아순시온 외곽 농업 지역에 정착하여 척박한 미개척지를 일구었습니다.
역사적 의미: 당시 한국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선구자적 시기로, 현재 한인 공동체의 '뿌리'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 부산항을 출발하고 있는 '보이스벤(BOISSEVAIN)'호
▲ 제1진으로 파라과이에 도착한 전원길씨가 온 길의 추적
② 제2기: 항공 이민의 등장과 상업 전환기 (1970년대 중반 ~ 1980년대 후반)
1970년대 중반부터는 이동 수단이 배에서 비행기로 전환되며 '비행기 세대'가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이민의 규모가 가장 컸던 황금기이자, 한인 경제의 체질이 바뀐 시기입니다.
주요 성격: 농업 중심에서 점차 상업 및 무역업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습니다.
정착 양상: 농촌에 머물던 1기 이민자들과 새로 유입된 인구들이 수도 아순시온(Asunción)과 국경 도시인 시우다드 델 에스테(Ciudad del Este)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 도약: 의류업, 잡화 유통 등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한인 사회가 파라과이 내 주요 경제 집단으로 부상했습니다. 현재 파라과이 내 한인 타운인 '메르카도 4(Mercado 4)'의 기반이 이때 닦였습니다.
▲ 1970년초 사시장 앞의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거리 (Rodriguez de Francia)
③ 제3기: 재이주와 글로벌 정착기 (1990년대 ~ 현재)
남미 경제의 변동성과 함께 주변국(브라질, 아르헨티나 등)과의 재이주가 빈번해지며 한인 사회가 더욱 다변화된 시기입니다.
주요 성격: 1.5세와 2세들의 성장으로 현지 주류 사회(법조계, 의료계, 정계 등) 진출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정착 양상: 단순한 생존형 이민을 넘어, 파라과이의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한 남미 공동시장(MERCOSUR) 무역 거점으로서의 가치를 중시하는 '전략적 이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적 가치: 60년의 세월을 거치며 다져진 한인들의 신뢰 자산은, 오늘날 파라과이 영주권을 취득하여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려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파라과이 한인 사회가 오늘날 남미에서 손꼽히는 견고한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아무런 정보도 인적 네트워크도 없던 시절 맨몸으로 부딪힌 선구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남겨진 그들의 발자취는 단순한 개인의 삶을 넘어 파라과이 이민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① 1963년 11월 20일: 첫 발걸음을 뗀 최재윤 씨
파라과이 공식 기록상 최초의 한국인 정착자는 1963년에 입국한 최재윤 씨입니다.
고독한 개척: 대한민국과 파라과이가 수교(1962년)한 지 불과 1년 남짓 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던 파라과이 사회에서 그는 홀로 언어 장벽과 문화적 충격을 견뎌내며 한인 정착의 가능성을 몸소 증명했습니다.
역사적 상징성: 그의 입국일인 11월 20일은 파라과이 한인 사회가 시작된 상징적인 날로 기억되며, 한 개인의 용기가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민족 공동체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최재윤씨와 부인 장정수씨
② 한성옥 목사와 한인 공동체의 결속
개별적인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구심점이 절실해졌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한성옥 목사입니다.
종교를 넘어선 복지: 1964년 파라과이에 도착한 그는 아순시온에 연합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새로 도착하는 이민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현지 적응을 돕는 '이민자 보호소'이자 '정보 공유의 장'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공동체 의식의 함양: 낯선 땅에서 방황하던 초기 이민자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서로 돕는 '계(契)'와 같은 협력 문화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③ 선구자들이 구축한 '신뢰'라는 자산
초기 선구자들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지 파라과이인들에게 "한국인은 정직하고 근면하며 교육열이 높다"는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민간 외교관 역할: 이들이 현지 공무원, 이웃들과 맺은 우호적인 관계는 훗날 대규모 농업 이민단이 들어왔을 때 파라과이 정부가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대적 의미: 현재 우리가 파라과이 영주권 심사에서 타 국적자에 비해 비교적 신속하고 우호적인 대우를 받는 배경에는, 60년 전 선구자들이 쌓아 올린 이 '신뢰 자산'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965년 2월, 이관복 씨의 인솔하에 파라과이에 도착한 제1차 영농 이민단 150명은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추진한 첫 대규모 정착 사업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장밋빛 미래와는 거리가 먼, 생존을 건 사투에 가까웠습니다.
① 이민자들의 인적 구성과 현실의 괴리
기록에 따르면 초기 영농 이민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고학력 도시 지식인층'이 대거 포함되었다는 점입니다.
화이트칼라의 변신: 서울의 유수 대학을 졸업하고 사무직이나 전문직에 종사하던 이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남미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파라과이 정부가 제공한 땅은 정글과 다름없는 미개척지였으며, 농사 경험이 전무했던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꽹과리와 삽뿐이었습니다.
행정적 불일치: 당시 한국과 파라과이 정부 간의 행정적 조율 미숙으로 인해, 이민자들은 본래 계획했던 비옥한 토지가 아닌 척박한 환경에 배치되는 등 초기 정착 단계에서부터 엄청난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 파인애플 농장에서 옛 일을 더듬으며 증언을 하고 있는 김성태, 구완서, 김진원, 전원길, 이승달씨 (좌로부터)
② 척박한 개척지와 혹독한 자연환경
이민자들은 카아쿠페(Caacupé)와 같은 지역에 정착하여 원시림을 농지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처절한 노동: 거대한 나무를 베어내고 뿌리를 뽑아내는 작업은 현대적인 장비 없이 오로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록에는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터져 피가 나도 멈출 수 없었다"는 고통스러운 증언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풍토병과 기후: 덥고 습한 아열대 기후와 낯선 풍토병, 그리고 정체 모를 해충들은 이민자들의 건강을 위협했습니다. 의료 시설조차 전무했던 상황에서 그들은 오직 정신력으로 버텨내야 했습니다.
③ 경제적 궁핍과 정체성의 위기
농작물이 수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수확을 하더라도 판로를 찾지 못해 경제적 곤궁은 극에 달했습니다.
식량난과 고립: 초기에는 옥수수 가루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허다했으며,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 한 통을 부치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 우체국에 가야 하는 고립된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정체성의 혼란: "내가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고생을 하고 있는가"라는 자괴감과 정체성의 위기는 육체적 고통보다 더 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인'이라는 이름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격려하며 공동체를 유지했습니다.
④ 실패를 성공의 밑거름으로 바꾼 끈기
비록 초기 농업 이민 프로젝트 자체는 예상치 못한 많은 장애물로 인해 '절반의 성공'이라 평가받기도 하지만, 이 시기 흘린 땀방울은 훗날 한인 경제의 상업적 전환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상업으로의 이동: 농업에서 겪은 시련은 이민자들이 도시로 진출하여 의류업과 무역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척박한 땅을 일구던 끈기는 치열한 시장 경쟁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습니다.
▲ 제재소로 수송할 나무를 원시림에서 벌목하고 있는 정성렬씨(오른쪽)는 은행장이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파라과이 한인 이민사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시대적 구분과 최초의 선구자들, 그리고 척박한 땅을 일구었던 초기 농업 이민자들의 치열한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분이 파라과이를 단순히 '거주권 취득이 용이한 나라'로만 알고 계시지만, 그 이면에는 6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역사의 층위가 존재합니다. 이 기록을 읽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이 땅에서 써 내려갈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 역사 시리즈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도 『파라과이 한인 이민 35년사』의 소중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한인 사회가 어떻게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는지, 그리고 교육과 문화를 통해 어떻게 현지 사회에 뿌리 내렸는지에 대한 더욱 깊이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공유할 예정입니다.
과거의 고난이 현재의 자부심이 되었듯, 여러분의 도전이 미래의 역사가 될 수 있도록 저희가 함께하겠습니다.
파라과이 이주 및 영주권과 관련한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60년 역사의 신뢰를 바탕으로 여러분의 성공적인 정착을 돕겠습니다.
Ines 드림